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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시니어매일] 파독 간호사 김숙화 씨를 만나다①
관리자 (kidadmin) 작성일 : 2019-08-26 14:51:33 조회수 : 61
파독 간호사 한국 경제발전에 거대한 마중물 역할하며, 독일 마르크(DM)의 고국 송금이 당시 한국 경제 성장에 10% 기여. 박정희 대통령 눈물과 외화 유치의 뒷얘기

조국 근대화의 상징인 포스코를 배경으로 김숙화씨가 카메라 앞에 섰다.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했다. 한국경제 규모가 OECD에서 10위권 반열이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갖는다고 하였다. 장기성 기자
 

1964년 12월 박정희대통령이 독일을 공식방문 했다. 12월 8일 아침 파독 근로자들을 만나기 위해 루르 탄광지대를 찾았다. 5백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가 강당에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앞에서 대통령은 목멘 소리로 인사했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진정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봅니다. 여러분의 조국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타국에 와서 고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고향이 그립고 가족이 보고 싶겠습니까. 정말 난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여러분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오지 않도록 만들겠습니다. 반드시...정말 반드시” 그러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마침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끝내는 대통령 자신도 울고 말았다. 곁에 있던 육영수여사도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그리고 수행원들도 모두 울었다.

이 일화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백영훈 박사가 쓴 글의 일부다. 백영훈 박사의 이름 앞에는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대한민국 경제학 박사 1호’, ‘파독 광부·간호사의 기획자’, ‘박정희 대통령의 통역보좌관’, ‘한국 산업개발연구원 설립자’, ‘박정희 대통령 경제자문역’ 등의 역할을 했다.

1965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7달러에 불과했다. 이것은 당시 237달러였던 필리핀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태국의 113달러보다도 작은 수치였다. 대량 실업과 경제건설을 위한 자본 부족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이 무렵, 고난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회가 해외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유명했던 독일에서 기회가 열린 것이다. 한국과 독일 정부 간 합의로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총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로, 정확히는 서독으로 파견됐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1960년 외환 보유고가 2천3백만 달러에 불과했을 정도로 한국에는 자금이 없었다. 외자도입이 절박했다. 1962년 외자유치 목표가 5천만 달러였으나 정작 유치에 성공한 금액은 6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미국이 5·16을 문제 삼아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원에 인색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찾은 돌파구가 독일이었다. 경제 부흥에 성공한 독일의 노동력 부족 현상과 한국의 외화에 대한 수요가 맞아 떨어졌다. 광부와 간호사를 비롯한 파독 근로자들이 1964년부터 1975년까지 10여 년간 고국으로 보낸 송금액은 총 1억 달러가 넘었다. 독일 정부는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1억5천9백만 마르크(약 4천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1964년 12월 박정희대통령이 독일을 공식방문 했다.12월 8일 아침 파독근로자들을 만나기 위해 루르 탄광지대를 찾았다. 5백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가 강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앞에서 대통령은 목멘 소리로 인사했다. Daum Image
 

1952년부터 1969년까지 약 20년 간 국제사회가 한국에 제공한 공공차관이 약 7억 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때 독일로부터 받은 송금액과 차관은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이렇게 해서 보내진 파독 근로자들의 외화 송금이 당시 경제성장에 미친 기여도를 수치로 분석한 자료가 있다. 권혁철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전문가의 분석 자료를 인용해 파독 근로자들이 보낸 송금은 우리 경제 기여도가 1965년 12.2%, 1966년 11.8%, 1967년 15.1%에 달했다고 밝혔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받은 임금을 고국 가족들에 보냄으로써 매년 한국 경제 성장에서 10% 이상의 기여를 했다는 의미다. 당시 파독 간호사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숙화(67)씨를 어렵게 만났다. 그간의 어제와 오늘의 일상을 들어보기로 했다. 숨 막히는 얘기를 듣다보니 길어져 4부로 나누어 시리즈로 게재하기로 하였다. 그는 파독이후 바이에른 주(州) 마르크 베르네크(Markt Werneck)에 살다가, 2000년 3월부터는 같은 주(州) 슈봐인푸르트(Schweinfurt)에 살고 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간호사 파독의 시작은 1966년부터 독일 마인츠대학교 의과대학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한국해외개발공사’가 간호 인력의 모집과 송출을 담당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만 2백 명의 간호 인력이 파독되었다고 하던데, 파독 간호사로 언제 독일로 갔습니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1974년 1월 8일 저녁 6시에 김포공항에서 네덜란드 국영 항공기(KLM)를 탔습니다. 생전 비행기를 처음 타본 거죠.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습니다. 기내 어디에선가 작은 흐느낌 같은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조국을 떠난다는 슬픔이 가슴 속에서 꽉 밀려왔을 때였습니다. 그 울음이 비행기가 멈출 정도로 합창이 되어 눈시울을 흠뻑 적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왜 그렇게 서럽던지요. 나중에 보니 모두 눈가가 새빨갛게 충혈 되었더라고요. 알레스카에서 2시간 중간 급유를 한 후에, 다음날 아침 6시(독일 시간)에 독일 쾰른-본 공항(Köln Bonn Airport)에 도착했습니다.

 

-파독 간호사 모집광고를 신문에서 직접 보았습니까. 아니면 간접적으로 듣고 알게 되었습니까. 궁금합니다.

▶1972년 3월경 가깝게 지내던 친구로 부터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당시 ‘한국해외개발공사’의 신문광고를 봤다고 했습니다. 채용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에 신체검사와 4개월간 독일어 연수도 했습니다. 합격하고 나서 1년이 지나서야 출국이 가능했습니다. 그 친구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갔으나 서로 다른 도시의 병원에 배정되었습니다. 나는 바이에른 주(州)의 병원으로, 그는 쾰른(Köln) 근방의 프레헨(Frechen)병원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1년에 3번 정도 만나서 함께 유럽여행도 했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두절되었는데, 이 ‘시니어 매일’을 그가 본다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왜 독일에 갈 생각을 했습니까?

▶경제적인 이유였습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 2학년까지 다니다가 재정적 압박으로 그만 둘 형편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더 이상 신세지기 싫어서 휴학계를 내고 제 스스로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당시에는 컸습니다. 집안형편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독일 가서 계약된 3년간 간호사 신분으로 돈을 벌어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땐 사실 그것이 제일 큰 이유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다른 길을 갔으나 지금 생각해봐도 후회는 없습니다.

 

막연히 알고 있던 파독간호사, 독일 현지에서 실제로 체험한 주인공을 만나보니 기대하고 상상했던 보다 더 값지고 보람된 삶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운명이 순간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하지만, 숙명이란 말도 왠지 머릿속을 스치며 맴도는 첫 인터뷰였다. 기회는 용기 있는 자의 것일까. 제2부에서는 그가 받은 급여는 당시 얼마였으며, 얼마동안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DM)을 한국으로 송금했는지가 궁금해졌다. 제2부에서 이런 이야기가 계속된다.

 

Tag#파독간호사#파독광부#경제개발 5개년 계획#독일 마르크#라인강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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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
링크1 : http://www.senior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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